▲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최봉영/지식산업사> ⓒ 박태영



나이주의에 대하여 (서평을 시작하기 앞서 잠시 소개.)


많은 독자에게 '나이주의(ageism)'는 생소한 단어일 것이다. 나이주의는 나이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여성학자 정희진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나이주의는 내가 속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같은 청소년단체에서 중요한 의제로 자리 잡고 있다.


나이의 의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조선 시대의 십 대는 정치적 주체이자 성적 주체였지만 현재의 십 대는 그러한 주체성이 박탈된 존재이다. 중세시대의 아동청소년은 노동력의 주체였지만, 지금의 아동청소년은 보호의 대상이다. 한국의 십 대와 유럽 국가의 십 대가 지니는 의미 또한 다르다. 여성학자 정희진에 따르면 '모성'과 '아동기'라는 규범이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듯, 인간의 나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적 제도의 산물이다. [각주:1]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곧 권력이다. 나이를 기준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별하고, 하대와 존대로 상대를 대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나이에 따른 역할과 규범이 설정되고, 그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할 경우에는 배제된다. 아동청소년의 흡연과 음주, 노인의 사랑과 성적 행동이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이유는 나이주의에 있다. (나이주의 속에서 흡연과 음주는 비청소년의 것, 사랑과 성적 행동은 청년의 것으로 규정된다.)


나이주의는 기성세대에게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하여 사회의 보수적 가치가 재생산되는데 기여한다. 사회의 관습과 전통,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나이주의를 바탕으로 연장자에게서 연소자에게 학습된다. 나이주의에 근거한 부모-자식 관계의 권력 차등은 '가족'을 효율적인 사회화 기관으로 만든다. 사회화 기관에는 또래 집단과 학교, 직장 등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각각 선배-후배, 교사-학생, 상사-부하직원의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갈등론의 관점에서 '사회화'는 지배집단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학습시켜 기존 권력구조를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나이에 따라 권력을 차등적으로 부여하는 방식은 여러 문제점을 낳는다. 첫째, 생애 주기를 설정하여 특정 나이에 알맞은 규범과 행동을 설정한 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나이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여 비정상을 배제한다. 이러한 배제는 폭력적이며, 불평등을 불러온다. 둘째, 나이에 따라 권력을 차등적으로 분배하여 연장자가 연소자에 대해 차별과 억압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나이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어 차별과 억압을 만들지만, 특히 아동청소년과 같은 연소자-권력의 최하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그 정도가 심각하며 나이주의는 이를 정당화한다. 노인과 같은 연장자 또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노인을 미성숙하며 판단능력이 부족한 존재이고 노동 능력을 상실한 복지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노인 차별이 극에 달하면 차별과 억압이 혐오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보수적인 성향과 노인들의 꼰대성을 '틀니딱딱'으로 비하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책의 주제와 구성


지배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계급, 인종, 언어, 성별, 지식, 이념 등과 같은 다양한 자원을 이용하여 차별과 억압의 일상화를 끌어냄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었다. (p.29) 


책의 내용과 함께 나이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 위해 간단히 나이주의를 소개해보았는데, 서론이 굉장히 길어졌다. 이 책은 한국의 권위주의와 차별, 억압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글쓴이인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는 그 주요한 원인으로 '존비어체계'를 꼽는다. 존비어체계는 존칭어와 비칭어로 언어의 차등을 두는 체계를 말하는데, 흔한 말로 바꾸면 높임말과 반말의 체계가 되겠다. 글쓴이는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을 원인을 존비어체계로 설정한 뒤, 그에 대해 여러 사례와 근거를 제시하며 주장을 전개한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글로 나누어져 있다. 글쓴이의 주장을 밝혀나가는 글이 있고, 따로 '길잡이글'을 두어 글쓴이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개념을 설명하거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나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글쓴이의 주장 자체는 책의 제1장인 '한국문화 속의 차별과 억압'만 읽어도 대략적인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앞의 70페이지 정도만 읽으면 책의 주장은 거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6개의 장은 앞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한 근거와 사례를 제시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여러 근거와 함께 수록된 길잡이글은 의미있는 문제제기와 새로운 논점을 던져준다.


총 18개로 구성된 글잡이글은 본문의 중간마다 수록되어 있다. 이 길잡이글 중에서 의미 있게 읽은 것을 몇 개 뽑아본다면, '길잡이 2 : '실례합니다'와 '죄송합니다'', '길잡이 6 : 중국인의 평등주의', ;길잡이 8 : 계급장 떼고 이야기하자', '길잡이 15 : 한국인의 거짓호칭과 호칭부풀리기' 등이 있다.


책의 구성 자체는 명료하고 글쓴이의 의견과 주장을 서서히 강화해나가기에 효율적으로 만들어져 있으나, 앞에 글쓴이의 주장이 대부분 등장하기에 뒤로 갈수록 책이 따분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색다른 문제제기와 논의가 많기에 뒷부분까지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 뒷표지 ⓒ 박태영



 존비어체계의 차별과 억압


글쓴이는 한국의 권위주의와 차별과 억압은 언어자원에 가장 큰 원인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 나간다. 한국의 존비어체계에 대한 글쓴이의 지적 중 의미 있는 것을 중심으로 소개해 보겠다. 글쓴이는 인간이 능력의 차이가 작거나 없는 경우에는 대등과 호혜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고, 능력의 차이가 많은 경우에는 차별과 억압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한다. (p.27) 이 내용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수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다. 상하의 관계맺음을 나이주의와 연관지어 보면, 한국인들이 처음 만난 이와 서로의 나이를 물은 뒤 연장자에겐 차별과 억압을 인용하며 존대하고, 연소자에겐 하대를 함으로서 차별 · 억압하며, 동갑인 사람과는 대등과 호혜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을 떠올리게 된다. 이 또한 위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책 속의 두 번째 글잡이글은 '실례합니다'와 '죄송합니다'의 차이에 대한 견해를 내놓는다. 글쓴이에 의하면 '실례합니다'는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이며 '죄송합니다'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실례합니다'는 상대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을 알리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를 담고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 '실례합니다'라는 말은 상대에게 공공연하게 무례를 일삼겠다고 선언하는 매우 억압적이고 공격적인 말이다. (p.25) 여기서도 언어체계에 깃들어 있는 권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아랫사람의 잘못은 죄송하다는 표현으로 반성과 후회를 담아야 하는 반면,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본인의 무례함과 잘못을 '실례합니다'라며 알리는 것만으로도 배려와 공손이 된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의 원인이 존비어체계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고려되는 다른 원인들을 하나하나 반박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예의', '공손' 문화가 유교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글쓴이는 '예의'와 '공손'에 담긴 모순적인 차별과 억압의 원인은 유교가 아닌 존비어체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유교의 근원지인 중국에는 차별과 억압의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반면, 유교를 국가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와 비슷한 문화가 존재한다며 그 근거를 댄다. 일본과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차별과 억압의 문화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과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존비어체계라는 언어특징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경우 유교적 전통이 존재하지만 대등한 언어관계 속에서 예의와 공손의 가치가 평등하게 적용된다.)


또한 한국의 존비어체계는 유교 수용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차별과 억압의 문화 또한 유교 이전에 존재했던 신라의 골품제도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존비어체계가 신분제도를 강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지적을 한다. 19세기 말에 신분제도가 철폐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신분제도가 청산되지 않고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1960년대까지 신분제가 유지되었음을 말하며, 신분 별로 정해져 있는 말투에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언어체계의 영향력을 보았을 때 한국의 존비어체계가 일상의 차별과 억압을 원인이 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나이주의와 존비어체계


이 책의 내용은 청소년운동 등의 나이주의 담론에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나이주의적 관념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은 바로 우리의 언어현장이기 때문이다. 권력 차이에서 발생하는 존비어체계는 나이 차이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고, 글쓴이가 글에서 말하는 모든 존비어체계의 차별과 억압의 예시는 모두 나이주의의 예시이기도 하다.


나이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 책에서 '한국 사회에서 나이주의는 어떻게 언어로 적용되는가?' 쯤의 질문에 제법 구체적이고 학문적인 결론을 얻어갈 수 있다. 이 책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존에 갖고 있던 나이주의라는 관심사에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대입할 수 있다는 점과, 앞으로의 나이주의 담론 구성에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다.


뒤에서 말할 내용이지만, 이 책은 저자의 보수적인 관점 탓에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말투와 높임표현 따위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발표된 글 중 가장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그 결론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나이주의의 이론적 배경과 언어에서의 적용 따위를 연구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주장의 의의와 한계


글쓴이는 우리말을 비판이 불가능한 일종의 신성한 영역으로 두는 학계의 분위기가 존비어체계에 대한 비판을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차별과 억압의 책임을 존비어체계에 쉽사리 묻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쓴이는 최종적으로 말에서의 평등과 토론문화의 정착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존비어체계의 청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존비어체계는 일상에서의 평등을 가로막는다. 한국 사람이라면 학창시절부터 선후배 관계에 따른 존대와 하대를 학습하고 모든 사람을 위아래로 규정하는 정서를 습득한다. 언어가 인간의 관념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크므로, 한국인들이 모든 사물과 현상에 높낮음을 따지는 결과를 만드는데 존비어체계의 잘못은 확실히 클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존비어를 나이의 차이 또는 직위, 능력, 계급의 차이가 아닌 친함을 기준으로 사용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이의 나이를 물어 본인을 기준으로 높낮음을 따지는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높낮음의 관계 속에서는 절대 평등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이와는 마땅히 서로를 존대하여 존중을 표하고, 친해진 후에 예사말로 서로의 친함을 표하며 편한 관계임을 확인해야 한다. 이는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한 반동과 반기가 아닌 언어의 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다.


이 책속의 여러 주장과 지적들은 학문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것이다. 존비어체계에 대한 비판이라는 흔치않은 주제로 우리 사회의 차별과 억압 양상을 명료하게 분석했다. 여기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담론의 형성이 꼭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의 의의는 실천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책은 학문적인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서 분석하는 대상이 일상의 언어와 문화라는 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나 또한 청소년운동을 하며 나이주의를 접하고, 내 안의 권위주의와 나이주의, 불평등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하지만 언어규범이 학습되는 과정은 굉장히 무의식적인 것이라, 이러한 학문적 분석을 접하지 않으면 구체적으로 나의 언어가 어떤 부분에서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인지 확인하기가 힘들다. 언어의 평등과 민주화를 위한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지침들을 구성하는데 이 책은 큰 도움이 된다.


반면 이 책은 존비어체계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에 대한 담론을 대표하거나 개론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근본적으로, 한 사회의 불평등은 상하관계의 인식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닌데, 글쓴이는 한국 사회의 상하관계를 분석하여 차별과 억압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근본적인 실수로 인해 여러 오류를 범하게 된다.


첫째, 글쓴이는 존비어체계의 불평등 요소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시민사회운동과 민중운동을 '존비어체계가 만들어낸 차별과 억압을 잘못된 곳에 분노를 표출한 것'이라며 깎아내리는 오류를 범했다.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에 시달릴 때마다 그것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국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는다. 무기력한 국가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면서 사람들은 과거의 정권, 정책, 역사에 대한 비하,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 기존의 동맹국인 미국에 대한 비난 등을 일삼는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에서 진보와 개혁에 대한 열렬한 동조, 민족과 통일에 대한 낭만적 기대, 북한체제에 대한 지나친 포용, 중국에 대한 막연한 호감 등을 갖고 있다. (p.22-23)


이러한 시민의 정서와 행동에는 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이유와 원인이 존재함에도 글쓴이는 이를 차별과 억압의 정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표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투쟁과 운동을 존비어체계의 차별과 억압에서 비롯되었다고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시민운동의 의의와 목적성은 생략된다.


오늘날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된 현실에 불만을 갖고 완강하게 저항한다.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홍수를 이루고, 걸핏하면 시위를 일삼고, 조금이라도 억울하면 결사투쟁을 외쳐대는 것은 모두 차별과 억압의 일상화에 대한 저항이다. (중략) 일례로 한국의 대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귀족노동계급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은 임금을 받고 있지만 계속 불만스런 모습으로 극단적인 투쟁을 외쳐댄다. (p.71)


글쓴이의 존비어체계 비판은 그의 보수적 성향과 맞물려 모든 투쟁을 억압 대상의 불평불만으로 일반화한다. 이는 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 또는 감정을 뒷받침하는데 학문적 분석을 일반화하여 사용한 것으로, 학자로서의 구체성과 논리성을 잃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둘째, 글쓴이는 나이주의에 대해 깊은 접근을 하지 못했다. 글쓴이는 24세의 이등병이 21세의 일등병에게 깎듯이 높임말을 하는 상황(p.86-87)에 문제를 제기한다. 글쓴이는 또 한국인이 나이가 어린 이가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부분을 볼 때 나이에 따라 존비어체계를 적용받아 불평등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는 나이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라기보다는 존비어체계의 잘못에 훨씬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존비어체계의 차별과 억압은 나이주의와 결합되었을 때 그 정도가 심각해지는데, 책에서는 나이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부족하다.


글쓴이가 24세가 21세에게 높임말을 하는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부분에서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높임말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인식함을 볼 수 있다. 물론 존비어체계의 사용이 나이라는 특정 기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계급, 직위 등 다양한 기준에 영향을 받음을 보이기 위한 예시긴 하지만, 글쓴이 스스로도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나이주의적인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 글쓴이는 존비어체계의 청산이 평등과 민주화를 불러오는 절대적인 방법으로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보편이 소수자에게 행하는 차별과 억압, 배제는 다양하고 복잡한 관념과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우리 사회의 보편자가 소수자에게 행하는 차별적 폭력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글쓴이의 모든 분석은 상하의 관계가 형성되는, 남성기득권 중심적인 관료사회와 서열사회, 계급사회, 연장자-연소자 사회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그 밖의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는 눈길을 두지 않는다.


비록 글쓴이가 우리 사회의 일상 언어 속에 만연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지적을 하고 싶었더라도, 이러한 부족함은 이 책의 한계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제목이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으로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억압을 망라함을 표하고 있지만 정작 글쓴이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글 속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소수자의 투쟁과 목소리냄을 모두 존비어체계의 차별과 억압 때문이라며 일반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의 지적은 언어체계의 불평등에 대한 지적에서도 완전하지 않다. 글쓴이는 지나치게 존비어체계의 잘못에만 집중한 까닭에 호칭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굉장히 빈약하며, 남성과 보편중심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현재의 언어문화에 대한 지적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존비어체계의 잘못을 일상속의 다양한 예시로 설명해주며, 언어의 평등과 민주화에 존비어체계가 큰 걸림돌임을 설명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훌륭한 저술이지만은, 글쓴이가 의도한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에 대한 양상을 분석하는 데는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드리는 부분에 있어서 고정관념을 깨줄 수 있는 글이라는 점은 높게 평가하며, 나이주의 의제에 관심이 있는 청소년 운동가들과, 한국의 불평등한 언어체계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1. (정희진(2005), <몸에 새겨지는 계엄령, 나이>, 월간 <인권> 제17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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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 청소년의 글과 꿈.

한 달 전쯤 쓴 선악의 이분법에 관한 글이다. 최근에 학교로부터 전학 권고를 받아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고, 여러 일을 겪으며 학내투쟁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정리했다. 내 안의 모순을 지적하는 예전의 글을 읽고 필요한 부분은 조금 보충하여 인제야 글을 완성해 보았다.

 


선악의 이분법


난 선악의 이분법이 싫다. 선악의 이분법이 정상 원리로 작동하는 공간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 예로는 한국의 의회정치(또는 정당정치)를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이 속한 세력과 이념의 반대에 있는 이들을 모두 으로 규정하고, 투쟁과 대립의 상대로 바라본다. 서로의 공존과 협력이 필요한데도 서로를 싸워야 할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으니, 효율성이나 진전,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공간이 우리 사회에 많아지면, 사회는 대립으로만 가득 차 끊임없이 비효율적이며 진전없는 모습을 띠게 된다. 이에 대한 민주 사회의 올바른 해결책이자 대안은 대화와 타협, 그리고 토론이라는 가치다.

 

선악의 이분법을 혐오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모습은 되돌아보지 못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목적으로 존중하는 것은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이런 존중을 배제하고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의 나는 지나치게 사회의 갈등관계에만 집착하여 학교를 투쟁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물론 학교-학생의 억압과 통제 이데올로기를 생각했을 때, 이러한 시선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치명적인 실수는 학교로 대표되는 잘못된 교육과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를 같게 여겼고, 교사를 투쟁대상이라는 틀에 가두고 대했다는 점이다. 교사는 억압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한 개인이며, 개인은 결코 투쟁이나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억압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주체인 기득권이자 기성세대 억압자이더라도, 그 책임은 체제와 제도에 물어야 하지 개인에게 물을 것은 아니다. 난 교사 집단을 억압의 주체이자 싸워야 할 상대로 상정했고, 그 결과,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싸우려 드는 한 학생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만을 만들었다. 이 여론의 주체는 어른과 교사가 아닌 학생들이었다.

 

난 이런 여론의 원인을 억압 이데올로기에 갇혀버린 학생들에서 찾았고, 그렇게 나의 투쟁방식과 행동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에 대한 학생여론의 회의, 혐오 반감은 국민이 한국 정당정치에 가지는 정치 혐오감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진전과 효율 없는 대립이 가져온 결과이다.

 

청소년 운동의 투쟁은(=나의 투쟁은) 대화와 타협, 협력, 토론이 있을 때 비로소 성과와 진전을 만든다. , 교육 주체로 학생을 상정함에 따라, 나의 주장이 학생 대중의 여론을 등에 업어야지만 투쟁을 민주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다. 지난 2주간의 선악의 이분법과 지배-피지배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한 투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난 선악의 이분법을 혐오하면서, 선악의 이분법을 생산했다. 성공적인 투쟁을 위해서는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학교를 타협과 설득, 토론의 장으로 만들자. 내 생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여론을 등에 업자. 여기에서 여론은 학생 여론과 교사 여론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내 생각이 교육 주체 여론의 대표성을 띔을 증명할 수 있을 때 교육 체제나 학교와 같은 억압 주체와의 협상과 토론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교사 여론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필요하다. 교사 또한 억압 이데올로기에 속해 있는 한 개인이자 교육 주체로서, 그들의 여론은 교육체제와 학교의 변화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학교의 관리자와 교육계 내외의 관료 여론도 함께 해야 하며, 지역사회의 일원과 시민사회 일원의 여론도 함께 해야 한다.

 

변화는 교육 주체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나간다. 이들 교육주체를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따라 선악으로 분류하지 말자. 맘속 깊이에 자리 잡은 선악의 이분법을 깨뜨리자. 타협과 대화, 목적으로서의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몸에 새기자. 교육 주체 모두와 동등한 위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샘솟는 학교를 만드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나가자. 교육주체 모두의 타협과 대화, 그리고 협력 속에서 성공적인 투쟁의 역사를 쓰자. 우리 모두의 투쟁을 위해, 내 생각이 객관과 정답이 아님을 머릿속에 다시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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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 청소년의 글과 꿈.

'교육공동체 벗'에서 만드는 교육 격월간 잡지 <오늘의 교육>에 '촛불 광장으로 부터 얻은 청소년 개인의 정치적 각성' 을 주제로 글을 한 편 써냈다. 



박태영

청소년바보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 회원

typark99@naver.com

 

경남 고성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입니다.

청소년운동을 막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청소년 인권과 교육, 그리고 사회의 차별적 구조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나의 광장

박태영

 


나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신문이나 뉴스를 꾸준히 보지는 않았고, 가끔 이슈가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수준이었다. SNS에 올라오는 기사를 가끔 곱씹고, 정치인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라며 현실 정치에 대한 막연한 혐오를 지녔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떠올릴 때는 나 자신이 조금은 좌파적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했다. 이 정도만 해도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청소년들에 비해 정치에 관심이 많은 놈이었다. 난 그 정도에 만족하며 살았다.


하지만 박근혜의 국정농단은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대한민국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말이 그대로 드러난 현장이었다. 정치에 적당히 발 담그고 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와 같은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방관이 이런 저질스러운 사태를 만든 주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광장에 나섰다.

 


3’아닌 시민

 

나의 첫 광장은 지난해 115, 경남 진주의 로데오거리였다. 날씨가 쌀쌀해지던 무렵 맨투맨 셔츠 한 장만 입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나갔다. 오후 4, ‘박근혜 퇴진 진주 비상시국회의사람들이 집회를 막 준비하고 있었고, 난 어색하게 앞에서 다섯째 줄에 앉았다. 주변에 서 있는 시민들이 나와 친구들을 쳐다보는 듯했다. 특히 내 또래 친구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어색한 첫 광장에서 괜히 남의 시선만 의식했다. 처음 앉아 본 광장은 사이즈도 안 맞고 옷감도 너무 뻣뻣한, 그런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날이 저무니 사람들의 시선이 덜 느껴졌다. 박근혜 퇴진 구호와 노래가 덜 어색해졌다. 행진을 시작했다. 1차선을 따라 끝없이 늘어선 촛불에 가슴 벅찼다. 진주라는 소도시에서 방송차를 2대나 썼으니 참가 인원이 꽤 많았던 날이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춥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기분은 사라지고, 군중과 하나 되어 박근혜 퇴진구호를 맘껏 내질렀다.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할머니들과 가던 길을 멈추고 행진 대열을 구경하는 시민들. 나는 내 또래 시민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첫 광장은 내가 국민이 되는 뿌듯하고 뜨거운 경험이었다.


작년 1112일에 서울에서 있었던 민중 총궐기는 참여하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이 커서 유튜브 방송으로 총궐기에 함께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인 1119, 서울로 갔다. 12시에 행진이 마무리되고 해산할 때까지 광화문에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 광화문이라 그런지 눈치도 보지 않았다. 자유 발언도 해 보고, 시위대의 가장 앞에서 집회를 함께했다. 첫 서울 집회에서 최대한 많은 걸 경험하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행진할 때는 정말 목이 찢어져라 구호를 선창했다. 많은 사람이 내 구호에 맞춰 후창했다. 내겐 아빠뻘 되는 나이의 시민들과 내 바로 옆에서 함께 걸어가던 할아버지까지 말이다. 기분이 묘했다.


12, 1월이 되고, 날이 더 추워지자 잠시 촛불을 드는 일을 멈췄다. 여러 사정이 있었다지만 핑계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올 2월 초, 볼 일이 있어 로데오 거리에 갔다가 지금까지 집회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11월의 촛불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내가 촛불을 잠시 잊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촛불을 들었다.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시민의 무관심이라는 점을 다시 되새겼다. 2월 한 달 동안 빠짐없이 집회에 나갔다. 지난 225일에는 민중 총궐기를 맞아 오랜만에 서울에 다녀왔다.


광장은 아직 조금 어색하지만, 그 속에선 내가 시민이며 국민이며 나라의 주인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더 큰 것은, 진정한 나의 나 됨을 느낀다는 것이다. 촛불 속의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대한민국 고3도 아니며, 내신 성적보다 모의고사 성적이 훨씬 나은 정시(수능)파 학생도 아니다. 난 그저 광장에 나온 시민 중 한 사람이다.

 


분노에서 성찰로

 

내 촛불은 분노로 시작했다.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분노였다. 대부분의 청소년들도 비슷한 종류의 본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 분노는 내가 대학을 가기 위해 힘든 공부를 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물음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나라가 이 꼴이 될 때까지 정치인들과 시민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냐는 분노와, 개인에게 희망을 빼앗기만 하는 이런 나라가 말이 되느냐는 분노였다. 나는 도대체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는 억울한 물음을 쏟아 냈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니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왔다. 내가 수많은 행복을 유예해 가며 목매 온 입시와 고등학교 생활이, 더러운 기득권에 편승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졌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청소년이 그토록 바라는 그런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귓등이 따갑도록 듣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을 몸소 이룬 사람들의 세상은, 너무나 추악하고 더러웠다.


입시로 시작되는 한국형 권력 다툼의 종착역은 참담했다. 우리 사회가 얄팍한 권력과 돈에 목숨 걸며 기득권의 행태를 답습하는 인간으로 가득 찬 듯 느껴졌다. 그리고 그 권력 다툼의 시작 지점인 입시에 목매 온 나도 그런 인간으로 느껴졌다. 출세에 대한 내면의 욕망을 미처 지우지 못한 나 자신의 모순성은 끔찍했다. 그게 무엇보다 화가 나고 미웠다. 내가 한명의 인간이 아니라, 입시 기계와 공부 기계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세주의 속에 갇혀 나 자신과 내 인생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 회의와 성찰 끝에 오는 물음은 꽤 본질적인 것이었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난 촛불 광장에서 소중한 고민을 시작했다.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다. 아직 정답은 모른다. 희미하게도 모른다. 다만 내 안에는 확실한 명제가 하나 생겼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이런 다짐은 촛불이 내게 가져다 준 결론이 아니라 더 큰 고민과 생각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내 생각과 목펴를 명확히 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대학에 가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하나하나 하고 있다. 1년 뒤로 유예했던 나의 주체성을 되찾았다.


어떻게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것인가 고민을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고민을 시작했다. 구체적인 결론은 없지만 이런 고민 하나하나가 진정한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에 집중하고 충실할 수 있게 됐다. 미래의 출세와 부와 명예를 위해 내 현재를 희생하지 않게 되었다. 더는 입시의 감옥에 나 자신을 가두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지금 입시 공부를 안 하고 이걸 해도 될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된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꿈꾸는 삶을 위해 노력한다. 촛불 광장은 출세에 대한 내면의 욕구와 강박에서 날 해방시켰다.


출세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자, 입시가 아닌 다양한 곳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다양성과 소수자에 관한 것이었다. 난 광장에서 다양성을 배웠다. 나의 권리와 자유만큼이나 다른 이들의 권리와 자유도 소중하며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를 배웠다. 광장에 나가기 전에는 늘 글로만, 머릿속으로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광장에서 내가 겪어야 하는 청소년 혐오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다른 소수자들이 겪는 혐오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글과 생각에 그쳤던 그동안의 고민을 광장에 나간 후에 어떻게 내 행동이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으로 바꾸었다.


되돌아보니 시민으로, 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려 노력하면서도 내가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고 존중하지 않은 적이 너무나 많았다. 수많은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다. 내 일상은 차별과 혐오와 배제로 가득 차 있었고, 언어생활조차 병신과 같은 혐오 표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면서 소수자 혐오를 반대한답시고 페미니즘 책도 읽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져온 소수자 인권에 대한 관심은 그저 날 꾸미는 치장이며 헛된 공부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언행 불일치와 내 안의 모순점을 하나하나 고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촛불이 없었더라면 난 나의 보편성과 평범성 안에서 수많은 이들을 배제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미완성이다

 

광장과 광장의 사람들은 날 굉장히 부끄럽게 했다. 그들 앞에서 내 그동안의 무지와 잘못과 모순성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지난 시간 동안 세월호 참사에 무관심했기에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셀 수조차 없이 소수자 혐오를 해 왔기에 혐오 표현에 반대한다고 외칠 수 없었다. 내 부끄러운 역사를 묻어 둔다면 나 역시 광장에서 당당할 수 없다. 오래 전의 이야기도 아니고 불과 몇 달 전의 부끄러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난 내 잘못을 하나하나 꺼내 놓고 반성하고 되새겼다. 그렇게 광장의 일부과 되어 갔다.


광장은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져 주었다. 내 안의 모순성을 끄집어내는가 하면, 앞으로 내 삶의 본질을 묻기도 했다. 부끄러움과 반성의 기회도 줬다. 광장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꿔놓았다. 끔찍한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나선 광장에서 마주친 건 끔찍한 내 모습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하나하나 인정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은, 내 안의 모순을 저지르지 않는 삶이다. 내 안의 모순을 끊임없이 분해하고 감시하면서 내가 먼저 변화하는 삶이다. 이게 광장으로부터 내가 얻은 정치적 각성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그 안의 모순점을 찾을 때 세상을 모순을 바라보는 안목도 생긴다. 이제 나는 내가 미완성의 인간이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 앎이 광장이 내게 가져다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광장은 날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광장이 던져 준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난 많이 변화했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여전히 나는 미완성이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그리고 주어질 수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과 결론은 마찬가지로 광장에서 찾아야 한다. 그게 내가 광장에 나갔고, 앞으로도 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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